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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의 존재의 의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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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대구 작성일21-01-27 00:28 조회2,8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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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Baldwin IV and the Crusader Kingdom of Jerusal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1. 군사적 역할에 대한 해석


The defeat of Hattin and the loss of the kingdom have cast a shadow on the reign of Baldwin IV in the minds of historians ever since Ernoul wrote his Chronicle. Attention has focused on those aspects of the reign which contained the seeds of future Frankish weakness and aided Saladin's victory.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this is not a view which people living at the time would have shared. The leper king's subjects recognised that they faced great dangers, but they did not expect to be defeated, and, indeed, while Baldwin lived they were not. Under his leadership they frustrated for some six years Saladin's plans to take over Nur ad-Din's empire and encircle the crusader states ; while Saladin's direct attacks on Frankish territory were for the most part ineffective. He suffered a disastrous defeat at Mont Gisard in 1177, and a decisive defeat at Le Forbelet in 1182 ; his newly formed navy did not cause the Franks any serious problem, and when his tried to capture Beirut by a joint land and sea operation his driven off. He twice failed to capture the fortress of the forest to Banias and the Mari Uyun in 1179 were fortuitous and for that reason were not followed through. Indeed, the only important successes that he achieved against the Franks in Baldwin IV's reign were his capture and demolition of Le Chastellet in 1179, and the destruction of Prince Reynald's fleet in 1182, and neither of these victories led to any loss of Frankish territory.

 

하틴에서의 패배와 왕국의 상실은 ErnoulChronicle을 쓴 이후부터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볼드윈 4세의 치세에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했다. 그 관심은 향후 프랑크의 약점과 살라딘의 승리를 도운 그 씨앗을 담고 있는 재위기간의 그런 면들에 집중되어 왔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공유했을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병왕의 신하들은 자신들이 큰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패배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실제로 볼드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지도 아래 그들은 누르 앗 딘의 제국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포위하려는 살라딘의 계획을 좌절시켰지만, 살라딘의 프랑크의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그는 1177년 몽기사르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1182년 르 포블렛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는데 그의 새로 결성된 해군은 프랑크족에게 어떠한 심각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고, 그가 육지와 해상의 공동 작전으로 베이루트를 점령하려 했을 때 그는 격퇴되었다. 그는 두 바니아스 요새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으며, 1179년의 마지 우윤은 운이 좋았고 그 이유로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그가 볼드윈 4세의 치세에 프랑크족을 상대로 이룬 단지 중요한 성공은 1179년 라 체스텔렛을 함락하고 파괴한 것과 1182년에 레이날드 공작의 함대를 파괴한 것이었고, 이 두 승리 모두 프랑크인의 영토를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2. 정치적 구심점으로서의 해석


It would appear that Baldwin judged rightly that there was nobody except himself who could hold the kingdom together unless some powerful western ruler would com and take on the task. For although William of Tyre tells us often how popular Raymond of Tripoli was, on both occasions when he tried to seize power he failed to command enough support. Nobody refused the serve Baldwin IV, who was the anointed king, and despite the divisions among the two years following his death show, not one else was capable of holding in check the divisions among the Franks which did and so much to facilitate Saladin's victory in 1187.

 

볼드윈은 강력한 서구의 통치자가 와서 그 임무를 맡지 않는 한 왕국을 함께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올바르게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티레의 윌리엄은 트리폴리의 레이몬드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종종 우리에게 말해주지만, 그가 권력을 잡으려고 할 때 그는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무도 왕으로 추대된 볼드윈 4세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 이후 드러난 2년간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1187년 살라딘의 승리를 돕는 데 기여한 프랑크인 사이의 분열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Saladin therefore was able to launch spirited attack on the Latin Kingdom secure in the Knowledge that the Byzantines would not retaliate and that the sicilians with who he was at peace would not attack Egypt. On 13 July 1182 a detachment of his army laid siege to the castle of Bethsan in southern Galilee. The king who had expected Saladin to invade, and who had already assembled the host at Saffuriya, marched to its relief. The Franks met with Saladin near Le Forbelet in south-eastern Galilee. His strength was formidable. William of Tyre reports that the older Frankish princes said that they had never before faced a Muslim army of such size. It is not known whether the king fought on his occasion, but he was certainly present at the battle. All sources agree that it was fought in intense ill as Baldwin to stay in the field; indeed, on the return march the canon of the Sepulcher who was carrying the Holy Cross collapsed and died from sunstroke. The Christian army was smaller than Saladin's force: William of Tyre reports that there were only about 700 knights present Nevertheless, although there was considerable slaughter of Christian infantry, few knights were killed, whereas Muslim losses were substantial. Saladin conceded defeat and withdrew across the Jordan, While the king ordered that host to return to the more temperate region of Saffuriya. This battle was fought on 15 July, the eighth anniversary of Baldwin IV's coronation, and although Muslim writers understandably tried to disguise the fact, Le Forblet was a Frankish victory: a far lager Muslim army had been forced to retreat with heavy losses by a determined Frankish cavalry force. Credit for this must be give, at least in part, to the leper king, for he commanded the respect and loyalty of all his vassals and was able to hold in check the factions that were to prove so damaging to the Frankish host once he became too ill to leat it.

 

따라서 살라딘은 비잔틴인들이 보복하지 않을 것이며, 시칠리아인들이 그가 평화를 누리는 이집트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라틴 왕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1182713, 그의 군대는 남부 갈릴리에 있는 베트세안 성을 포위했다. 살라딘의 침공을 예상했던 왕은, 이미 사푸리야 성채에 병력을 집결해 두었고, 그 영지를 향해 진군했다. 프랑크인들은 갈릴리 남동부의 르 포블렛 근처에서 살라딘을 만났다. 그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티레의 윌리엄은 노련한 프랑크 영주들이 전에는 그러한 규모의 무슬림 군대와 마주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왕이 그의 (그러한) 상황에서 싸웠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확실히 전투에 참석했다. 모든 자료들은 볼드윈이 현장에 머무르는 동안 극심한 병과 싸웠음에 동의한다. 실제로, 귀환 행진에서 성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던 성묘의 성직자가 쓰러져 일사병으로 사망했다. 기독교 군대는 살라딘의 군대보다 작았다. 티레의 윌리엄은 약 700명의 기사가 참석했다고 기재했다. 비록 기독교 보병이 상당히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거의 죽지 않았고 무슬림 군대의 손실은 상당했다. 살라딘은 패배를 인정하고 요르단을 건너 철수하는 동안, 왕은 그 영지에서 사푸리야 지역으로 철군을 명령했다. 이 전투는 볼드윈 4세의 대관식 8주년인 715일에 벌어졌고, 1) 무슬림 저술가들은 당연히 사실을 위장하려 했지만 르 포블렛은 프랑크인의 승리였다. 훨씬 더 큰 무슬림 군대는 강인한 프랑크족 군대에 의해 큰 손실을 입어 후퇴해야 했다. 이것에 대한 공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나병 왕에게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가신들에게 존경과 충성을 얻었고, 프랑크인의 군대에 피해를 입힐 파벌들을 저지할 수 있었는데, 그 때는 그가 너무 아파서 살이 벗겨질 때였다.

 

주석 1) 이 해인 1182년은 보두앵 4세의 재위 후반부에 가깝다. (1174-1185)


+


"In spite of [Baldwin's] illness the Franks were loyal to him, they gave him every encouragement ... being satisfied to have him as their ruler ; they exalted him ... they were anxious to keep him office, but they paid no attention to his leprosy."

 

[볼드윈의] 병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인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들은 그를 통치자로 둔 것에 만족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그를 고귀하게 대접하며 그의 직책을 유지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의 나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해당 책의 P. 243의 내용, Muslim scholar (무슬림 학자) "Imad al-din")




3. 종교적인 해석


"The king is not such a man as can rule that land, since he, that is to say Baldwin who holds the government of the realm, is so severely afflicted by the just judgment of God, as We believe you are aware, that he is scarcely able to bear the continual torments of his body."

 

왕은 그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 왕국의 정부를 쥐고 있는 볼드윈은 하나님의 틀림없는 심판으로 매우 심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그의 육체의 계속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


(해당 책의 P. 164의 내용, Pope (교황) "Alexander III")

 

Although Pope Alexander III described Baldwin IV as stricken with leprosy by the just judgment of God, Baldwin's subjects did not share this view. One reason for this may have been that he remained chaste. It was widely believed by learned physicians as well as by the general public that lepers were extremely lecherous. Indeed, this became a literary topos. Moreover, when kings or great nobleman lived chastely this was regarded by their contemporaries as a sign of supernatural grace. That Baldwin, who was both a leper and a king, remained chaste, must therefore have been seen as evidence of unusual sanctity of life. Even more persuasive was Baldwin's success in war against the Saracens. The participants in the Frist Crusade had been convinced that they were fulfilling God's will, and the failure of subsequent crusades was attributed to the sin of those who took part, which incurred God's displeasure. It therefore followed That Baldwin's success against Saladin was a sign remembered as a last successful Christian defender of the Holy City of Jerusalem. 

 

비록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볼드윈 4세가 신의 틀림없는 판단에 의해 나병에 걸렸다고 묘사했지만, 볼드윈의 신하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정절을 지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병 환자가 극도로 호색적이라는 것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학식 있는 의사들에 의해서도 널리 믿어졌다. 실제로, 이것은 문학적 토포스 (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나 사상가 되었다. 게다가, 왕이나 위대한 귀족이 정숙하게 살았을 때, 이것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초자연적인 은총의 표시로 여겨졌다. 나병 환자이면서도 왕이었던 볼드윈이 정절을 지켰다는 사실은 2) 생애에서의 특이한 신성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사라센인들에 대항한 전쟁에서 볼드윈의 성공이었다. 1차 십자군원정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확신했고, 그 후의 십자군원정의 실패는 참여한 사람들의 죄에 기인했고, 이는 하나님의 불쾌감을 야기했다고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살라딘을 상대로 한 볼드윈의 성공은 예루살렘 성소의 마지막 성공적인 기독교 수호자로 기억되는 표시였다


주석 2) 보두앵 4세는 배우자와 소생이 모두 없었다. 




4. 죽음과 평가


He had sent to ask for help from western rulers and specially from his Angevin Kinsmen, to care for the realm during the minority of his nephew, and had made a superhuman effort to remain head of state until that help arrived but his bodily strength had not proved commensurate with his strength of will. When he knew that he was dying he had tried to ensure that the government would continue to function smoothly after his nephew came to power.

 

그는 그의 조카 3) 가 미성년자인 동안 서구의 통치자들, 특히 그의 앙주 가문 국왕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고, 그 도움의 손길이 도착할 때까지 국가 원수로 남으려는 초인적인 노력을 했지만 그의 체력은 그의 의지력에 걸맞지 않았다.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의 조카가 집권한 후에도 정부가 계속해서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주석 3) 약 2년간 공동 왕이자 후임 왕이었던 조카 보두앵 5세 



On the day he died the king summoned his vassals for the last time, and they came to pay their respects to the young man who had ruled Jerusalem for eleven years. The good-looking child whom William of Tyre had tutored and who loved riding and become blind, crippled and deformed Yet he had never sheltered behind his illness in order to escape form the duties of state: he had led his army in battle until he could no longer ride and had then been carried in a litter at the head of his host. Until within a few days of his death he had been present at meetings of the High Court and been concerned with arrangements for the succession. Few rulers have remained executive heads of state when handicapped by such severe physical disabilities or sacrificed themselves more totally to the needs of their people.


그가 죽은 날, 왕은 마지막으로 신하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11년간 다스린 그 젊은이에게 경의를 바치기 위해 왔다. 티레의 윌리엄이 가르쳤으며, 말을 타는 것을 좋아했고 그리고 장님이 되고, 몸이 불구가 되어 볼품없어진, 그 잘생긴 아이는 국가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병 뒤에 숨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을 때까지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다가, (그 후에는) 가마 위에 누워 있으며 그의 주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 며칠도 안 될 때까지 그는 고위 궁정회의에 참석하여, 세습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한 심각한 신체적 장애로 인해 기능할 수 없거나 혹은, 그들 사람들의 필요에 더욱 전적으로 그들 자신을 희생하면서, 국가 원수로 남아 있는 통치자들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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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most commands our admiration is Baldwin's strength of will, which enabled him to discharge his royal duties despite the severity of his illness. His contemporaries admired his for that too, but they admired him even more, because, despite his disabilities, he was a successful ruler.

 

우리가 감탄할 만한 것은 볼드윈의 의지의 힘인데, 볼드윈의 강한 의지는 그의 병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도 그에 대해 감탄했지만, 그들은 그를 더욱 존경했다. 왜냐하면 그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적인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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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prosy which had affected him since the beginning of his reign ... became much worse than usual. He had lost his sight and the extremities of his body became completely diseased and damaged, so that he was unable to use his hands and feet. Yet although some people suggested to him that he should abdicate and lead a retired life, drawing and income from the royal demesne, he had refused to surrender either the royal office or the government to kingdom, for although his body was weak and powerless, yet he was strong in spirit, and made a superhuman effort to disguise his illness and shoulder the burdens of kingship."

 

그의 재위 초기부터 그에게 영향을 끼친 나병은... 평소보다 훨씬 심해졌다. 그는 시력을 잃고 몸의 끝부분이 완전히 병들고 손상되어 손발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퇴위하고 왕실 영지에서부터 이끌어진 수입을 얻으며 은퇴 생활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었지만, 비록 몸이 약하고 힘이 없었지만 그의 정신은 강했기 때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고귀한 직무나 왕국의 정부 둘 다 모두 내주는 것을 거부했고, 병을 위장함과 함께 왕의 존엄을 어깨에 짊어지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해당 책의 P. 187의 내용, His teacher (그의 교사) "William of Tyre")